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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Past Lives (전생 ; 前生)
존재계의 양손이 어머니 우주의 통로, 즉 여성의 성기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안에는 각 시대의 모습과 얼굴들이 나타나 있다.
자신이 전생에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을까 공상하는 데 몰입한다면, 그것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생과 생을 거치며 이어지는 카르마(karma,業)의 패턴(pattern)과 우리의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카르마의 뿌리를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다.
양쪽에 있는 두 마리의 무지개색 도마뱀은 앎과 무지를 상징한다. 두 도마뱀은 무의식의 수호자이며, 우리가 언젠가는 부서질 환상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 존재의 영원성을 힐끗 보는 것은 하나의 선물이다. 우리의 생(生)들 속에서 카르마의 작용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상나팔이다. 당신이 살면서 겪는 하나하나의 일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영혼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카르마의 패턴을 배울 수 있다.
Osho Hyakujo: The Everest of Zen, 7장
도움말:
전생에 많은 명상을 통해, 죽음의 어둠과 맞설 수 있을 만큼의 명상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았었다면 그대는 어려서부터 의식적일 수 없다. 죽음이 찾아오면 그대는 모든 것을 망각하고, 새로운 자궁을 찾는다. 자신의 전생은 완전히 잊고 만다. 전생과 현생은 완전한 단절, 불연속 상에 놓이게 된다. 어둠과 무의식이 생(生)과 생 사이의 불연속을 만들어낸다. 동양은 생과 생 사이의 장벽을 뚫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일 만년에 걸친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수많은 전생들을 본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깊은 명상 상태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대는 전생을 볼 수 없다. 첫째, 그대가 명상 속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대는 다른 생으로 통하는 문을 찾을 수 없다. 둘째로, 그대가 다른 생으로 통하는 문을 찾았을 때, 전생의 수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홍수처럼 밀려들기 때문에, 그대는 깊은 명상 상태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의 생을 꾸려 나가는 것만 해도 벅찬 일이기 때문이다.
Innocence (순수)
이 카드의 노인은 어린아이와 같은 기쁨을 발산하고 있다. 그는 자신에 대해 편안해 할 뿐만 아니라, 삶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것에 감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주위에는 기품이 감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 위에 있는 사마귀가 가장 절친한 친구인 양, 사마귀와 즐거운 교감을 나누고 있는 듯하다. 그 주위에 쏟아져 내리는 분홍 꽃잎은 내맡김과 이완, 그리고 감미로움을 상징한다. 꽃잎은 그의 현존에 대한 감응이며, 그의 내면세계의 모습이다.
깊은 삶의 체험을 통해 우러나오는 순수성은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지 ‘유치한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의 순수성은 아름답지만 무지하다. 어린아이는 자라면서 세상은 위험하고, 험난한 곳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순수성 대신에 불신과 의심이 자리하게 된다. 그러나 순수하게 삶을 전체적으로 살 때, 지혜와 끊임없이 변하는 삶의 신비를 받아들일 수 있다.
Osho Dang Dang Doko Dang, 7장
도움말:
그대가 지식을 버리면, 즉 다른 사람들이 그대에게 준 모든 것들 - 이름, 신분 - 을 버리면 그대는 완전히 다른 존재, 순수한 존재가 된다. 이것이 선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페르소나(persona), 즉 외적인 인격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며, 또한 그대의 순수성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그대는 다시 태어난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Beyond Illusion (환영의 초월)
이 카드의 나비는 외부 세계, 끊임없이 변하는 것, 그리고 실재가 아닌 환영(幻影)의 세계를 나타낸다. 나비 뒤에는, 영원한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의식’의 얼굴이 있다.
양 눈썹 사이에 열려있는 공간에서, 영적인 개화(開花)를 상징하는 연꽃이 피어나고 있으며, 각성을 의미하는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내면의 태양이 떠오를 때 명상이 태어난다.
이 카드는 우리에게 외부 세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고,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외부 세계에 초점을 맞추면 “이건 옳아, 저건 틀려” 혹은 “이건 좋아, 저건 싫어”하는 판단에 휘말려 들게 된다.
이런 판단으로 인해 우리는 잠, 낡은 습관, 낡은 삶의 방식 등 환영에 갇혀 살게 된다. 모든 것을 생각해서 판단을 내리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안으로 들어가라. 그 속에서 당신은 꿈과 실재의 차이를 알 수 있는, 당신 자신의 가장 깊은 진리 속에서 휴식할 수 있다.
Osho The Great Zen Master Ta Hui, 12장
도움말:
꿈과 실재의 유일한 차이는 실재에서는 의심할 수 있지만, 꿈에서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종교는 지금까지 의심의 뿌리 자체를 잘라버렸다. 따라서 종교는 인류의 적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종교는 사람들이 그들이 설교해 온 특정한 환영(illusion)들을 믿고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왜 끊임없이 고타마 붓다와 같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자아(自我), 그대의 각성을 제외한 모든 것은 무상하며 꿈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겠는가? 그들은 지금 여기에 보이는 나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 보이는 기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환영’이라는 말로 인해 오해하지 말라. ‘환영’이라는 말은 실은 적절한 말이 아니다. ‘환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실재는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마야(maya)는 그 둘 사이에 존재한다. 거의 존재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걱정하는 매일 매일의 생활들에 대해서도, 그것은 실재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의미에서, 그대의 깨달음의 절정에서, 마야 또한 비실재이며 환영이다.
Completion (완성)
여기 조각 그림 맞추기의 마지막 조각이 제자리 - 내면의 지각(perception)의 자리인 제3의 눈 - 에 놓이고 있다. 끊임없이 변하는 삶의 흐름에서도 완성의 순간은 찾아온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도 관심을 기울여 온 작은 조각들을 하나의 전체적인 그림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 완성의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할 수도 있고, 혹은 살면서 수없이 만나게 되는 ‘끝’과 새로운 ‘시작’을 받아들이고 감사할 수도 있다.
당신이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었던 일이 지금 끝나가고 있다. 그것을 마무리하고 나면 당신은 새롭게 시작할 무언가를 준비할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지금, 옛 것과 새 것을 찬미하라. 옛 것은 끝나고, 새 것이 찾아옴을 기뻐하라.
Osho Joshu: The Lion's Roar, 5장
도움말:
말을 완결 짓지 않는 것, 이것이 선의 방식이다. 이것을 이해하라.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방편이다. 선에서는 산문식으로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그 말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대답은 항상 불완전한 채로 남는다. 스승은 그저 방향만을 가리킬 뿐이다. 그대가 한계에 도달하게 되는 그때,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대는 선을 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선은 질문에 대한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그 안에 보다 깊은 무언가를 담고 있다. 선은 실재, 그 자체를 가리켜 보여 준다. 불성(佛性)은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의식이 바로 불성이다. 그대의 의식은 세상 만물을 비추며 바라보고 있다. 세상이 끝나고 아무것도 비출 것이 없다 해도 이 의식의 거울만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