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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쇼젠 창조성 카드 사진
    창조성

    CREAVITY (창조성)

    밑에서는 물과 불의 연금술(alchemy)이, 위에서는 신성(神性)의 빛이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이 카드의 인물은 창조의 힘에 문자 그대로 ‘사로잡혀’ 있다. 
    창조성에 대한 경험은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테크닉, 기술, 지식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그 문을 여는 열쇠는 만물을 탄생시키는 에너지 속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이 에너지는 어떠한 형상도, 틀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모든 형상과 틀은 이 에너지로부터 나온다. 
    당신의 창조성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림이 될 수도 있고, 노래가 될 수도 있으며, 정원에서 꽃을 가꾸는 것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요리를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을 통해 표현되고자 하는 것에 열려 있는 것이다. 자신의 창작물을 소유하려 들지 말라. 창작물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진정한 창조성은 신성과의 합일을 통해, 그리고 신비와 미지의 세계와의 합일을 통해 일어난다. 그때 그것은 창조하는 이에게는 기쁨이, 타인들에게는 축복이 된다. 
    Osho A Sudden Clash of Thunder, 4장

    도움말: 
    창조성이란 그대가 하고 있는 일상의 행동들에서 나타나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사물에 대한 내적인 접근방식이다. 모든 사람이 화가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모든 사람이 화가라면 세상은 추해질 것이다. 살기 힘들 것이다. 모든 사람이 무용수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창조적이 될 수는 있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 기쁨으로, 사랑으로 행한다면, 그대의 행동이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때 그것은 창조이다. 그 행위를 통해 내면의 무엇인가가 자라난다면,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창조적인 것이다. 그것은 신성한 것이다.
    그대가 창조적이 될수록 그대는 좀 더 신성(神性)에 다가가게 된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이 창조자라고 말한다. 나는 신이 창조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대가 더 창조적일수록 그대는 더 신성해진다. 창조성이 절정에 달하여, 삶 전체가 창조 행위가 될 때, 그대는 신 안에서 살게 된다. 창조적이었던 사람이 신에게 가장 가까웠던 것을 보면, 신은 창조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대가 하는 일을 사랑하라. 그대가 그 일을 하는 동안 명상적으로 하라. 그것이 무엇이든지! 

     

     

    반역자

    Rebel (반역자)

    이 카드에 나오는 힘차고, 자신감에 차 있는 인물은 자기 운명의 주인임에 틀림이 없다. 그의 어깨에는 태양의 문장(emblem)이 있다. 그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횃불은 그가 혼자서 불굴의 의지로 쟁취한 진리의 빛을 상징한다. 
    여기 이 반역자는, 사회가 강요하는 억압적인 조건화(conditioning)라는 쇠사슬을 부수어 버렸기 때문에 가난하든, 부유하든 그는 진정한 황제이다. 그는 무지개의 모든 색깔을 받아들이며, 무의식의 어둡고 혼란스런 과거로부터 벗어나, 날개를 펴고 하늘로 비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만들어간다. 그의 삶의 방식 자체가 바로 반역적이다. 
    그가 어떤 대상과 싸우기 때문에 반역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참된 본성을 발견하고, 확고하게 그 본성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그를 반역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메신저인 독수리는 그의 정신의 상징이다. 반역자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고, 진리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고 말한다.
    Osho The Zen Manifesto: Freedom from Oneself, 9장

    도움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에게는 힘이 있고, 오라(aura)가 있고, 자력(magnetism)이 있으며, 관습의 감옥으로부터 젊은이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카리스마(charisma)가 있다.
    깨달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이 문제이다. 그를 감옥에 가둘 수는 없다. 내면을 발견한 천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는 혼란을 일으킨다.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해도, 방해받기를 원치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그대로 살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불행하지 않은 사람은 그들에게 이방인으로 보인다. 
    깨달은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낯선 이방인이다. 그는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다. 어떤 조직도 그를 가둘 수 없다. 어떤 사회도, 어떤 국가도 그를 가둘 수 없다.

     

     

    없음,무

    NO-THINGNESS(: )

    틈 사이에 머무는 것은 두려울 수 있고, 혼란스러울 수 있다. 거기에는 아무런 붙잡을 것도, 어떤 방향 감각도 없으며, 앞에 어떤 가능성과 선택들이 놓여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것은 바로 이런 순수 잠재력의 상태이다. 
    지금 당신은 이런 아무 것도 없는 무(無) 속에서 편안하게 이완하기만 하면 된다. 말과 말 사이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보라. 들숨과 날숨 사이의 틈을 지켜보라. 그리고 그 때 찾아오는 텅 빈 순간을 잘 간직하라. 신성한 무언가가 태어날 것이다. 
    Osho Take it Easy, 1권, 5장

    도움말: 
    붓다는 참으로 큰 잠재력을 지닌 수냐타(shunyata)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것은 영어로 ‘없음(nothingness)’이라고 옮겨지지만, 원어의 아름다움을 전달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없음(nothingness)’이라는 말 대신에 무(無, no-thingness)라는 말을 쓴다. 왜냐하면 무(無, no-thingness)는 아무 것도 없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無)는 모든 가능성으로 고동친다. 그것은 잠재성이다. 절대적인 잠재성이다. 아직 싹트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처음도 본성(nature)이며, 끝도 본성이다. 중간에서 그처럼 야단법석을 떨 필요가 무엇인가? 중간에서 걱정하고, 불안에 떨고, 그렇게 탐욕스러울 필요가 무엇인가? 왜 스스로 절망을 만들어내는가? 
    ‘무(無)에서 무(無)로 향해가는 것’, 그것이 우리 여정(旅程)의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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